[현장 뷰] 기념관을 통해 본 전태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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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뷰] 기념관을 통해 본 전태일의 삶
  • 김경수 기자
  • 승인 2019.03.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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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에 위치한 전태일기념관이 내달 정식 개관에 앞서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 / 김경수 기자    


[시사주간=김경수 기자]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9년이 지나고, ‘전태일 기념관’이 문을 열면서 그의 삶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전태일 열사는 1948년 9월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미싱 기술로 서울에 상경한 후 미싱 보조를 거쳐 1966년 통일사에 미싱사로 근무했다.

이때 전 열사는 당시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12~13세 여공들이 일당으로 당시 커피 한 잔 값인 50~70원을 받으며 14시간 이상 일하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격했다. 노동자들이 폐렴 등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노동환경 개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폐렴을 얻어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전 열사도 사업주들에게 밉보여 해고됐다.

전 열사는 해고된 후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내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삼동친목회’를 설립해 126장의 노동실태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이 담긴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했다. 이 사실은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탄력받은 삼동친목회 회원들은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계속 협의를 벌였다. 그러나 봉제공장주들은 거듭 강경 입장을 보이며 그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당시 22세였던 그는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기로 결심해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불길에 휩싸였다. 전 열사는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노동계에 큰 영항을 끼쳐 본격적인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됐고, 1970년대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여성 노동자를 중심으로 결성됐다. 대기업 노조도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회사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목소리를 못 내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린 전 열사를 보며 각성한 것이다.

2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에 위치한 전태일기념관이 내달 정식 개관에 앞서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 / 김경수 기자   


이처럼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 열사 기념관이 49년 만에 평화시장 인근에 개관됐다. 정식 개관은 내달 중순이다.

내부 3층을 들여다보면 전 열사의 유품과 당시 노동계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작업장을 재현한 시민체험장이 들어섰다.

2층은 공연장으로 활용되며, 60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음악극 태일’을 시작으로 상반기 7개의 공연이 이어진다.

기념관은 하절기(3~10월)는 오전 10시~오후 6시, 동절기(11월~2월)에는 오전 10시~오후 5시30분까지 운영된다. 매주 월요일과 설날·추석 당일은 휴관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은 서울 종로구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 위치해있다. SW

kks@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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