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두언, 1957년 3월 6일-2019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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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두언, 1957년 3월 6일-2019년 7월 16일
  • 황채원 기자
  • 승인 2019.07.1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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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보수의 품격' 보여준 '풍운아' 정두언
17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정두언 전 의원의 빈소에서 한 조문객이 조문하고 있다. 사진 / 이원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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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황채원 기자] '이명박 정권의 개국공신'으로 불렸으며 각종 방송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진짜 보수'의 목소리를 전했던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16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의 한 공원 인근 북한산 자락 길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유서가 발견됐고 타살 혐의점이 없다는 점에서 정 전 의원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았으며 유족의 뜻에 따라 부검을 실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이 16일 저녁 전해진 정 전 의원의 죽음에 충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바로 그날 아침 정 전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회의원 시절 한미 FTA에 찬성했다가 비난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정치가 차분하게 논의되어야하는데 무조건 반대만 하다보면 이런 일이 생긴다. 한일 문제도 마찬가지다. 보수 진보 논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밝혔다. 바로 아침까지 멀쩡하게 목소리를 전했던 사람이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하니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그의 죽음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2000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권고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 합류했고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서울시 정무 부시장으로 일하며 최측근으로 활동해왔다. 그리고 2004년 국회의원 당선 이후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우며 '이명박 정권의 개국공신'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의 총선 불출마를 요구했고 당내 실세들을 공격하면서 이명박 정권과 점점 멀어졌다. '풍운아'의 길을 갔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10개월간 구치소에 수감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향한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방송사마다 다양한 시사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고 방송국들은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정 전 의원에게 맡겼다. 그렇지만 그가 방송에서 한 역할은 단순한 대변인 역할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분석과 촌철살인의 표현으로 현 정치의 문제점을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그의 말들은 보수가 아닌 이들에게도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려줬다. '보수=억지, 시대착오'라는 프레임을 깨게 한 이가 바로 정 전 의원이었다.
 
그의 죽음에 여도 야도, 보수도 진보도 없는 이유는 그가 마지막날 아침까지 보여준 '보수의 품격' 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 민정수석은 "한국의 자칭 '보수'가 이 분 정도만 되어도 정치발전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분과 같이 손잡고 일하고 싶었다"는 말을 전했고 정 전 의원과 토론에서 '라이벌' 관계였던 정청래 전 의원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한 채 "애통하다. 믿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일이..."라는 말만 전했다. 성향은 달라도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았던 관계였기에 슬픔이 더 컸을 것이다.
 
자칭 '보수'들이 막말과 억지 논리를 내세우며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상황에서 진정한 보수의 목소리를 전하던 이가 사라졌다는 것은 국민에게도 비극이 될 것이다. 그가 보여줬던 '보수의 품격'을 이제 누가 보여줄까? 정녕 '품격있는 보수'는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로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정리하려고 한다. SW
 
hcw@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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