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칼럼] 또 다른 탐욕스런 돼지들을 만든 동물농장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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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칼럼] 또 다른 탐욕스런 돼지들을 만든 동물농장의 혁명
  • 주장환 논설위원
  • 승인 2019.09.0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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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주장환 논설위원] 정치적 풍자가 가득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좀도둑 같은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혁명을 부르짖던 동물들이 혁명에 성공하지만 새로운 세상은 커녕 더욱 위태로울 뿐이다. 혁명 리더들이 초심을 버리고 자신들의 탐욕만을 채워나간다. 작가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클로버가 생각한 미래는 배고품과 구타에서 벗어나고 모든 동물이 평등하며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예를 들어 자신이 앞다리로 새끼 오리들을 보호해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러나 어디에서 잘못된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클로버가 꿈꾸던 미래 대신 찾아온 것은 누구도 감히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내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대며 농장 여기저기를 휩쓸고 돌아다니고, 친구들이 죄를 자백한 다음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은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그러한 사회였다.”

사회주의 혁명은 불평등과 억압 그리고 가난한 삶이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동물들은 수퇘지 메이저 영감의 호소에 힘입어 반란을 일으킨다. 농장주 존스와 관리인들을 내쫓고 <동물 농장>으로 이름을 바꿔 농장을 운영한다. 그들은 목이 터지게 외친다.

우리네 삶은 비참하고 힘들고 짧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 겨우 힘에 풀칠할 정도의 먹이만 받아먹고, 일을 할 수 있는데까지 혹사당하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끔찍하고 잔인하게 도살 당하지요.”

그런데 반란에 성공하고 뭔가 좀 되어가나 싶었던 동물농장은 풍차 건설을 계기로 권력투쟁이 시작된다. 이상주의자 스노우불은 나폴레옹에 의해 축출되며 나폴레옹은 개 9마리를 내세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무소불위의 독재망을 구축한다. 서로 의견을 모으던 일요회의도 폐지하고 풍차 건설을 빙자해 동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농장주 존스가 다시 쳐들어온다는 위협을 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불평하거나 항의하는 동물을 첩자로 몰아 숙청하고 작업량을 늘이고 식량배급을 줄인다.

나폴레옹과 측근들은 존스 시대의 인간보다 더 호화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들은 존스가 살던 집으로 이사해서 술을 마시며 흥청대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식용 교실을 짓고 심지어는 적이라고 몰아냈던 인간들과 상거래를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한다.

<동물 농장>은 인간 사회의 적폐라고 주장하던 그 상태로 돌아가고 만다. 혁명은 변질됐으며 혁명의 성공은 또 다른 탐욕스러운 돼지들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 전에 동물들을 착취했던 인간이 하던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던 혁명은 완전히 타락했다.

조지오웰의 말처럼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이미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것은 자명하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을 우린 결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향은 없다. 완벽한 이상은 세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훌륭한 제도나 이상도 누군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할 수 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운영해나가는 사람의 인격과 인의예지신 정신에 달려 있는 것이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설쳐대는 일부 정치인들의 사고는 해방전후사의 인식혹은 19세기에 머물러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꿀을 핥아 먹으며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발을 디디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불만·소외·약자층을 등에 엎고 국민 세금으로 마음껏 선심을 쓴다. 이들은 좀도둑과 같다. 하는 일 없으면서 명분과 정의, 평등과 공평 등의 이름만 도둑질하여 항상 남이 알까 두려워하면서도 뻔뻔하다. SW

jj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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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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