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고향', 관념이 된 '민족', 작가들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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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고향', 관념이 된 '민족', 작가들의 질문
  • 황채원 기자
  • 승인 2019.12.2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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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SeMA 중동현대미술전 고향'
하젬 하브, 땅의 지도 1-4#, 2019, 나무 판 위에 사진 콜라주, 각 120×200cm. 컨템포러리아트플랫폼 쿠웨이트 소장
하젬 하브, 땅의 지도 1-4#, 2019, 나무 판 위에 사진 콜라주, 각 120×200cm. 컨템포러리아트플랫폼 쿠웨이트 소장

[시사주간=황채원 기자] 중동. 오랜 전쟁이 이어지면서 누군가는 고향을 잃고 누군가는 고향을 빼앗겼으며 그렇게 고향을 잊어가고 고향이 없는,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그들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이 중첩되고 지속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중동의 미술가들은 '민족'이라는 관념적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SeMA 중동현대미술전 고향>(이하 <고향>전)은 이처럼 복잡한 사회역사적 배경을 가진 중동 지역의 현대미술을 살펴보는 전시다. 

전시는 '기억의 구조', '감각으로서의 우리', '침묵의 서사', '고향 (Un)Home' 네 가지 섹션으로 나뉜다. 먼저 '기억의 구조'는 중동/아랍에서 실질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고향을 빼앗기고 빼앗는 영토 분쟁을 둘러싼 사진 기록과 이로 인한 충돌, 폭력, 상실, 억압의 사건 주변으로 발생하는 개인적 경험과 사적 기억을 기록하는 이미지, 사운드 설치, 드로잉 작업 등이 소개된다.

이집트의 반독재 정부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2009년, 도로교통 표지판의 이미지에 새로운 상징을 결합하며 사회 질서,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진 라이드 이브라힘의 작품들, 이슬람 프로파간다가 지속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교육을 지배해 온 미움, 증오, 죽음의 문화 커리큘럼을 파헤치는 하딤 알리의 <이단자를 위한 'ㅇ', 지하드를 위한 'ㅈ'>, 예루살렘의 옛날 사진, 나무 둥치의 단면, 기하학적 도형 등을 콜라주로 조합한 일종의 '기억 지도'를 제시하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출신인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와 억압을 문화적인 존재로 바꾼 하젬 하브의 <땅의 지도> 시리즈 등이 선보인다.

와엘 샤키, 십자군 카바레: 1299년 자크 드 몰레 대주교의 예루살렘 함락(클로드 자캉의 1846년 회화를 따라), 2018, 나무 조각에 채색, 금박, 250×450cm. 작가 및 리손갤러리 제공
와엘 샤키, 십자군 카바레: 1299년 자크 드 몰레 대주교의 예루살렘 함락(클로드 자캉의 1846년 회화를 따라), 2018, 나무 조각에 채색, 금박, 250×450cm. 작가 및 리손갤러리 제공

'감각으로서의 우리'는 단순한 교환 행위의 범위를 넘어 상호성을 통해 구성되는 '우리'라는 '유대감' 혹은 의식적 감각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를 묻는다. 유대감이 곧 '우리'의 시작이고 이를 바탕으로 중동/아랍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엮어 생각해볼 수 있을지 질문하는 작품들이다.

톱밥과 풀을 이용해 부조 기술을 활용하면서 팔레스타인에서 경험한 폭력적 억압을 알리고 연대를 구현하는 압둘 헤이 모살람 자라라의 작품들과 90년대 이후 등장한 대표적인 여성 현대예술가인 술리만 만수르의 대표작 <깨어난 마을>, 팔레스타인 무속신앙, 미신 등을 차용해 상실과 기억, 소속감을 노래하는 주마나 에밀 아부드의 <오 고래여, 우리의 달을 삼키지 마오!> 등이 주목되는 작품이다.

'침묵의 서사'는 숱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탈락하거나 망각한 시간을 기입해 새로운 기원을 부여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허구를 더한 자신의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통 자수 기법을 차용한 드로잉으로 작업한 무니라 알 솔의 <전 농부들에게 이발만 해드렸을 뿐인데, 그들은 자정까지 일을 하며 제게 호의를 베풀었지요>, 아랍의 관점에서 바라본 십자군 전쟁을 표현한 와엘 샤키의 <십자군 캬바레> 시리즈 등을 만날 수 있다.

모나 하툼, 거리 측정, 1988,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35초, 모나 하툼, LUX 런던 제공
모나 하툼, 거리 측정, 1988,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35초, 모나 하툼, LUX 런던 제공

마지막 '고향 (Un)Home'은 고향을 잃어가고 고향이 없어지는 모습 속에서 나오는 질문들을 모나 하툼, 아흘람 시블리, 김진주 등 작가들의 비디오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는 섹션이다. 작가의 입을 손이 막으며 말을 하지 못하는 일그러진 얼굴을 클로즈업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장벽, 고요한 느낌의 화장실이 소음으로 산산조각나고 평화로웠언 모습이 내부 공간을 침해하는 외부의 가혹한 현실을 암시하는 이미지로 채워지는 등 은유가 담긴 비디오 작품들이 던지는 질문을 주목해볼 만 하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고향> 전시는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여러 미술적 활동을 살펴보고, 한국이라는 지역에서 상상 가능한 교감에 참여하기를 독려하며, 공감과 교감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고 전시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전시는 2020년 3월 8일까지 열린다. SW

hcw@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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