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칼럼] 20대 농인의 죽음이 전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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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칼럼] 20대 농인의 죽음이 전하는 이야기
  • 김철환 활동가
  • 승인 2020.01.1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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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과 장애인단체 관계자들이 농인의 언어권 보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장애인들과 장애인단체 관계자들이 농인의 언어권 보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시사주간=김철환 활동가] 지난 주 지인으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20대 초반의 농인(청각장애인)이 가슴앓이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소식을 전해 준 농인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고인이 된 그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수어(手語)를 모르는 부모와 소통이 잘 안되었습니다. 부모로부터 애정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취학시기에 맞추어 친척이 사는 도시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농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입학한 학교에는 농학생은 없고, 중복장애 학생들만 있었습니다. 소통방식이 달라 급우들과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받았던 소외가 학교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장애인 직업전문학교를 거쳐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직장에서도 소통이 원활하게 안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겉돌았습니다. 결국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그림자처럼 살다 갔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자신의 삶이 아닌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농인들이 있습니다. 많은 농인들이 가정에서부터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소외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어느 농인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들을 수가 없으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정확한 내막을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부모를 가슴에 품고 살던 그는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학교교육도 다를 바 없습니다. 농인을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적인 정체성을 갖도록 교육하는 학교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교는 농인으로서가 아닌 듣는 타인인 사람(청인)처럼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합니다. 농인이되 자신을 부정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농인과 청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농(聾)청년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주변의 요구대로 정체성을 숨기고 청인처럼 사는 이도 있습니다. 청인과 농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혼란스러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온전히 농인으로서 ‘자기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농인과 수어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 자체가 ‘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고인이 된 이의 슬픔은 혼자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모든 농인의 것입니다. 이는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농인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수어를 배울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국립국어원(2008)의 조사를 보면, 조사 대상 농인 가운데 53.8%가 친구를 통하여 수어를 배웠다고 답변했습니다. 부모를 통하여 수어를 배웠다고 답변한 비율은 3%에 그쳤습니다. 이 조사가 시간이 꽤 흘러 지금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합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2019) 연구에 의하면 조사대상 농인 가운데 언어발달이 필요한 유아기와 아동기에 수어를 배운 비율이 26.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고인이 된 그는 20대 청년으로서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던 미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인을 통하여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모두를 두고 간 이유는 단절된 사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 주변의 농인들이 있습니다. 수어로 자유롭게 소통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고인이 된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섭니다. 우리 환경이 그를 극단의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죽음 앞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수어나 농인에 대해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어 모른척했고, 편견으로 외면하는 동안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인이 된 이의 명복을 빌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농인들의 삶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청인의 그림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농인들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들에 대한 교육, 노동, 사회서비스 등 복지시스템이 올바로 바르게 작동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이들에 대한 편견은 없었는지를 말입니다. SW

k646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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