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칼럼] '사흘만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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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칼럼] '사흘만 볼 수 있다면'
  • 김철환 활동가
  • 승인 2020.01.2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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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왼쪽)와 설리번 선생
헬렌 켈러(왼쪽)와 설리번 선생

[시사주간=김철환 활동가]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는 시청각장애인으로 장애인의 권익향상에 기여한 인물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렇게 장애로 인한 한계를 넘은 것으로 알려진 헬렌 켈러에게도 보고 싶어 했던 것들이 있었다. 헬렌 켈러가 50대에 쓴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에서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헬렌 켈러는 첫째 날에 자신의 삶을 열어준 설리번 선생님과 사랑하는 친구들, 애견들과 자연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 둘째 날에는 빛이 어둠을 밀어내는 풍경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보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도시 한복판을 거닐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로 올라가 도시의 풍경을 보겠다고 했다. 그런 이후 뉴욕의 5번가를 걷고, 공장지대나 슬럼가, 공원 등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사흘이 지나 다시 암흑세계에 갇히더라도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을 것이라 했다. 사흘 동안 본 기억들이 손끝으로 만지는 사물마다 묻어날 것이니 말이다.

헬렌 켈러는 생후 9개월경에 열병으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았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세계를 누볐다. 그렇다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했을까, 이에 대해서 몇 가지 의견이 있다. 그 가운데 부부이며 연구동반자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미셸 루트번스타인’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 <생각의 탄생>(에코의서재, 2007)에서 ‘유추(類推)’를 이야기했다. 헬렌 켈러가 보거나 듣지 못했지만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을 바탕으로 한 ‘유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유추’가 있어서 다양한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헬렌 켈러가 감촉과 맛 냄새만으로 세상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유추할 수 없다면 창조할 수 없다”는 위 저자들의 주장처럼 유추가 없었다면 온전히 세상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간과한 것이 있다. 발전적인 ‘유추’를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언어도 필요하고, 타인과의 소통도 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되어야 총체적인 관점에서 유추가 가능해진다. 즉, ‘유추’를 말하기 이전에 다양한 경험이 있고, 경험을 개념화 할 수 있는 언어 환경이 되는지 살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헬렌 켈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그녀의 스승인 설리번(Anne Sullivan, 1866~1936)이다. 고집불통이며 말썽꾼이었던, 통제가 안 되었던 소녀, 그런 헬렌 켈러는 설리번을 만난 이후 마음의 눈을 떴다. 설리번의 교육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기 시작했다.
 
설리번은 초기에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글씨를 쓰거나 타도마법(Tadoma Method)을 통하여 가르쳤다. 타도마법은 상대의 입술과 목청에 손가락을 대서 말을 읽어내는 대화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헬렌 켈러는 .사물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알게 된 이름과 단어의 파편을 모아 문장을 만들고, 개념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내용도 이해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고 공감능력도 확장되어갔다. 어느 날 자신이 부셔버린 인형을 원래대로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헬렌 켈러는 난생처음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한다.

즉, 헬렌 켈러에게 ‘유추’라는 활동은 스승 설리번을 만나면서 작동되었다. 인간의 창조적인 삶에서 ‘유추’는 중요한 사고의 요소이지만, ‘유추’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헬렌 켈러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헬렌 켈러가 세상을 떠나고 50여년이 흐름 지금,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갇혀 사는 이들이 있다. 헬렌 켈러가 설리번을 만나기 이전의 상태처럼 말이다. 이들은 ‘유추’는 고사하고 주위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시청각장애인들이다. 전국에 1만 여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사회활동을 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이다. 대부분은 올바른 복지서비스는커녕 기본적인 의사소통 지원도 못 받고 있다.

이들에게 복지지원은 절실히 필요하다. 의사소통도 긴급히 지원되어야 한다. 설리번이 그랬듯 의사소통을 지도하거나 지원할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촉수어(수어를 손으로 만져 소통하는 방법)나 점화(손가락으로 손등에 접자를 찍듯 두드리며 대화하는 방식) 등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들이 필요하다. 전문 인력을 파견하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관도 필요하다. 이러한 지원 못지않게 장애인 보조공학 기기들도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다.

다행인 것은 지난해 관련 법률이 개정된 것이다. 늦었지만 정부에서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조만간 이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이들을 지원할 전문인을 양성하기 위한 방안들도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은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한 잡지(Reader's Digest)에서 "20세기 최고의 에세이"로 선정이 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헬렌 켈러의 장애극복 스토리로는 지금의 복지정책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울컥하는 감정만으로 시청각장애인들에게 서비스를 줄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니 말이다.

지금의 시청각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흘 동안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장애’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사흘이 아니라 평생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를 통하여 총체적인 ‘유추’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복지이고, 인간으로서 권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헬렌 켈러의 삶을 통하여 이러한 관점을 다시 새길 때이다. SW

k646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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