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칼럼] 아프고 다치고 죽고... 당신 탓 아니다, 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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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칼럼] 아프고 다치고 죽고... 당신 탓 아니다, 일 때문이다
  • 이정현 환경운동연합 사무부총장
  • 승인 2020.05.0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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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발의 운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달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발의 운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시사주간=이정현 환경운동연합 사무부총장]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4월 29일, 그날도 38명의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현장에서 일하던 78명 중 38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다. 2008년 1월, 40명이 사망하고 9명이 다친 이천 냉동창고 화재사고의 판박이다. 스러지고 나서야,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재난 수준의 참사여야만 사회적 이슈가 되는 그림자 같은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이다.

1년에 2000명, 하루 7명이 산재 사고로 숨지는 나라. 크고 작은 사고 산재 피해자를 합하면 연간 9만명이 넘는다.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 하던 중 전동차에 부딪혀 사망한 19살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모군, 2인 1조 근무 규정이 있지만 홀로 일하다가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밸트에 끼어 숨진 청년 노동자 김용균. 둘 다 현장 유품으로 컵라면이 나와 많은 이들을 더 서럽게 했다. 

이들의 희생을 대가로 산업안전법(일명 '김용균법')이 다시 만들어졌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산업현장의 안전규제를 대폭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윤에만 눈이 멀어 안전을 돌보지 않은 세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날, 대법원은 ‘태아 건강 손상도 여성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 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2010년 제주의료원에서 임신한 채로 일하던 간호사 15명 중 6명 만이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소송을 제기한 제주의료원 전직 간호사 4명의 아이는 모두 선천성 심장질환이 있었다. 소송인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유산했다. 

대법원은 불규칙한 교대근무 등 강도 높은 노동과 시달린 데다 알약을 삼키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이를 빻아 투약하는 과정에서 산모와 태아 둘 다 유해 약물에 노출되었다는 간호사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2011년부터 9년 동안, 정부에 신고된 피해자 6,757명 중 사망자만 1,532명인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윤에만 혈안이 된 기업들의 탐욕과 이를 관리하고 견제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이 합작해 빚은 화학물질 대참사다. 이후 가습기살균제 참사 재발 방지법이라 불리는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화평법) 등 화학물질 안전관리법제들이 만들어졌고, 지난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구제법까지 제정되었다.

그런데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 경제단체들이 가습기살균제 참사 재발 방지법인 ‘화평법’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 코로나19 국가 재난과 경제 위기 상황을 핑계 삼아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교훈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만든 화학물질 안전관리법제들을 흔들고 있다. 

지난 23일 경총은 40개 입법 과제를 제안하며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 제정된 화평법이 ‘산업 활동에 악영향을 미친다’ 며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전경련 또한 코로나19 위기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법안을 무력화시키는 내용의 ‘경제계 긴급 제언문’을 발표하며 규제 완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전경련과 경총 등 경제단체들은 그 뒤 틈만 나면 화평법 등 화학물질 안전관리법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규제 완화를 외쳐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을 제정할 때도 ‘자기책임주의 원칙 등에 위배 된다’며 반대한 바 있다. 

가습기살균제와 같은 독성물질은 작업 현장뿐만 아니라 생활 공간에도 널려있다. 삶의 곳곳이 유해 화학물질 지뢰밭이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가습기 살균제에서 시작된 ‘케미포비아(화학물질에 대한 공포)’는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다. 장난감·학용품·일회용기저귀·생리대·자외선차단제·색조화장품 등에서 유해성분이 검출됐다. 매일 주고받는 영수증이나 요가 매트에서는 비스페놀 A 같은 환경호르몬이 나왔다.

‘화학물질 전성시대’ 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 청소년이다.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지만 아직 해독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빈곤층에 그 피해는 가중된다. 우리를 맘 아프게 했던 어린 학생의 깔창 생리대 사건 이후 무상 배포한 전체 생리대의 34%(68,058명분)가 독성 생리대였다.

산업재해나 화학물질 안전관리법제들은 같은 사고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이자 시대적인 흐름이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기업 활동의 걸림돌이나 거추장스러운 규제로만 보고 있다. 

따라서 강화된 ‘산업안전보건법’이나 ‘화학물질 안전관리법제’ 들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20대 국회가 방치한 가칭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 들을 조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안전관리 규제를 흔드는 것은 국민의 안전을 흔드는 것이다. SW

leekfe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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