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3월 26일-2020년 7월 10일…박원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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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3월 26일-2020년 7월 10일…박원순의 길
  • 황채원 기자
  • 승인 2020.07.1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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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뉴시스
故 박원순 서울시장. 사진=뉴시스

[시사주간=황채원 기자]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 하지만 국민들에게 ‘원순씨’로 남아있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별세했다. 불과 이틀 전인 지난 8일 ‘서울판 그린뉴딜’을 발표하며 의욕적으로 활동하던 그였기에 사망 소식을 듣고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그의 죽음은 정치권은 물론 서울시민, 국민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1956년 경남 창녕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박 시장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며 엘리트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입학한 지 3개월 만인 1975년 5월 故 김상진 열사의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4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학교에서 제적되면서 그의 삶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후 사법고시에 합격해 한때 검사로 재직하기로 했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사람을 잡아넣는' 검사가 아니라 약한 이들과 함께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이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미국 문화원 사건 등 전두환 정권 당시의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도 그였다. 6년간의 법정 투쟁을 겪은 이 사건은 마침내 우 조교의 승리로 끝이 났고 이를 통해 성희롱이 불법이라는 인식이 심어졌다. 과거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변호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변호한 이도 그였다.

그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그리고 희망제작소다. 1994년 참여연대의 설립에 기여한 박 시장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낙천낙선운동, 소액주주 권리찾기운동 등을 이끌었다. 참여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2000년 총선에서 ‘바꿔’ 열풍을 일으키며 정치 물갈이의 신호탄을 쏘았고 재벌의 영향력 아래 권리를 찾지 못하던 소액주주들을 일으키며 시민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후 2001년 설립한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기부문화를 대중화하고 200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협치 기관으로 평가받는 희망연구소의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한국의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10일 새벽 경찰들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10일 새벽 경찰들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그러나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자신을 사찰했다고 폭로하면서 박 시장의 삶은 다시 바뀐다. 사찰 논란과 뒤이어 일어난 오세훈 당시 시장의 ‘무상급식 반대’를 겪으면서 그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생각하게 된다.

당시 여론은 출마 선언도 하지 않았던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기울어진 상황이었지만 안 원장이 박 시장 지지를 선언하면서 여론은 급반전했다. 뒤이어 민주당 후보로 나선 박영선 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의 경선에서 승리하며 ‘야권 단일후보’가 된 박 시장은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까지 꺾으며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입성한다.

이후 2014년, 2018년 서울시장으로 계속 당선되며 헌정 사상 최초 3선 서울시장, 최장수 서울시장으로 입지를 쌓았다. 서울시립대 반값등록금, 서울시 부채 감소 등을 실천하던 그는 2015년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당시 박근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며 직접 메르스 대응에 나서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는 서울삼성병원 의사가 확진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특정 다수가 참석한 행사에 간 것을 인지하고도 정부가 공개하지 않자 한밤중에 긴급 브리핑을 통해 이를 알리면서 “서울 시민의 안전을 위해 대책본부장으로 진두지휘하겠다”고 선언하며 메르스 확산을 막는 데 노력했다.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 당시 그는 당시 경찰이 물대포로 집회를 막으려하자 “서울시 소화전에서 쓰는 물은 화재 진압을 위한 것”이라며 수돗물 공급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의 행동으로 촛불집회는 100만의 힘을 모을 수 있었고 결국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부 수립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박원순 시장이 남긴 유서 중 일부.
박원순 시장이 남긴 유서 중 일부.

최근에도 그는 코로나19 방역 대책과 함께 '서울 10년 혁명'을 내건 ‘강남북 균형발전’ 비전을 제시하고 그린뉴딜 정책을 발표하는 등 서울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강한 추진력과 더불어 '원순씨'라는 애칭으로 대표되는 친근한 이미지, SNS를 통한 활발한 소통으로 시민과 시의 벽을 허물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보수진영의 공격도 많이 받아왔다. 시청앞 퀴어 퍼레이드를 허가했다는 이유로 보수 기독교계의 비판을 받았고 세월호 광장 조성을 놓고도 보수진영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특히 최대집 대한의사협회가 제기했던 ‘아들 병역비리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기는 했지만 임기 내내 박 시장을 괴롭힌 사건이자 보수진영들이 박 시장을 끊임없이 공격한 빌미가 되기도 했다.

원순씨, 아니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개인적인 호불호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시민과 함께하고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 애썼던, 시민을 위해서는 정부와 맞설 줄도 알았던 그의 삶을 한 번은 기억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꿈꿨던 ‘서울시의 변화’를 이제 누군가가 이어가야 할 때다. SW

hcw@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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