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칼럼] 나훈아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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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칼럼] 나훈아 신드롬
  • 오세라비 작가
  • 승인 2020.10.0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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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
사진=KBS

[시사주간=오세라비 작가] 고백하건대 필자는 트로트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근래 트로트 열풍이 전국을 휘감고 있어 노래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지만, 여전히 트로트에 영적으로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필자의 성장기는 미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였다. 넓은 의미의 ‘팝’이라 부르는 대중음악을 듣고 자랐고, 현재도 여전히 즐겨 듣는다.

기타치던 오빠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팝을 들었다. 어쩌다 손에 들어온 팝송 책을 거의 보물처럼 여기던 때였다. 당대 최고 인기 가수 사진이 표지에 실려 있고, 가사는 영어와 한글번역이 함께 쓰여 있는데다 팝 가수들의 근황도 짧게 소개된 소책자였다. 1960년대 말부터 팝 장르는 재즈, 스윙, 리듬앤블루스, 컨트리를 비롯해 로큰롤, 소울, 록, 디스코, 훵키, 그리고 1980년대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를 거치고 힙합의 발발에 이르기까지 질풍노도처럼 흘러갔다. 팝의 변천사를 따라 즐기다보니, 어린 시절 필자는 친구들 사이에 걸어 다니는 팝송백과사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니 트로트가 귀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가사는 거슬렸고, 한국인의 ‘한과 흥이 담겼다’는 트로트 장르에의 적응은 여전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나훈아 만큼은 조금 특별했다. 나훈아의 노랫말은 이상하게도 귀에 콕콕 박혀 맴돌았고, 멜로디는 여타 트로트 가요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나훈아의 곡들은 트로트 장르에만 한정시키기는 부족하다. 그의 곡들 대부분이 트로트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그것을 넘어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태어나 자랐던 부산 동구 수정동은 나훈아의 고향 초량동과 붙어있는 동네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나훈아의 천재적인 노래 실력은 풍문으로 자주 들었다. 초량동 시장을 지나가면 상인들은 어린 시절 나훈아 이야기로 화제였다. 나훈아의 일화는 상인들의 입을 통해 들어도 충분할 만큼 넘쳤다. “나훈아가 노래를 그렇게 잘 부르더니 결국 서울로 갔다”부터 “나훈아가 초량극장 앞에서 노래 부르다가 엄마가 몽둥이 들고 쫒아와 집으로 끌려갔다더라”던 이야기까지. 훗날 그는 <홍시>를 작사·작곡해 그때 속을 썩인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부산시 동구 일대는 극장가 중심지였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집 근처엔 수정극장, 초량극장, 미성극장이 있었다. 어릴 때 수정극장에서 한국 공포영화의 고전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며 얼마나 공포감을 느꼈는지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다. 그 너머에는 극장 쇼로 유명한 보림극장 등 극장들만 약 10곳이나 몰려있었다. 동구 주변에는 일명 고무신 공장이라 불리던 국제고무, 삼화고무 등 신발 공장들이 즐비했다. 동구 일대 부둣가에서 일하는 수산업 노동자, 신발공장 노동자들이 잠시나마 삶의 애환을 달래고자 극장을 찾아 영화 관람이나 가수들의 쇼 공연을 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노래 잘 부르던 나훈아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갔다. 몇 년 후 극장 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는 보림극장 앞에 나훈아 공연 포스터가 붙었다. 서울로 떠났던 나훈아는 성공한 가수가 돼 공연을 왔다. 나훈아가 공연 하는 날이면 보림극장 앞은 인산인해였다. 보림극장 앞에 모인 군중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나훈아는 당대 최고 인기가수가 됐고, 그의 히트곡은 전국에 메아리쳤다.

나훈아는 숱한 인기곡을 만들고 불러 히트를 치면서 시대의 감각도 놓치지 않았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초까지 해마다 히트곡을 냈다. 조금 잊혀 질만하면 어디선가 그의 새로운 노래가 들려왔다. <갈무리>, <무시로>, <영영>,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등 이런 곡들이 팝 음악만 듣던 필자의 마음 속에도 어느 틈엔가 파고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나훈아는 부당하게 폄하되거나 루머가 많았던 가수이기도 하다. 톱 가수로서 그 정도쯤 감수하더라도 재능에 비해 세간의 평가가 박한 면도 분명 있다. 나훈아와 그의 노래에서 표현되는 정서를 두고 개개인의 호불호 또한 극명하게 갈린다. 하지만 변함없는 사실은 그가 최고이자 전설이라는 명칭에 손색없는 가수라는 것이다. 200여 곡이 넘는 곡을 히트시킨 싱어송라이터는 한국 가요사에 전무후무하다. 그가 부른 노래만 2600곡에 달한다. 요즘 주가를 올리는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가장 많이 커버하는 곡의 원래 주인공 또한 바로 나훈아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달 30일, KBS가 선보인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공연은 대중들에게 그가 어떤 가수인지 다시 한 번 깊이 각인시켰다. 일명 ‘나훈아 신드롬’이다. 숱한 대중가수가 명멸하는 음악계에서 73세의 노가수가 2시간 30분 동안 보인 에너르기쉬와 카리스마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노랫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을 담아 대중의 가슴에 정확히 와 닿았다. 2020년에도 신곡 아홉 곡을 자작곡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신곡 <내게 애인이 생겼어요>의 노랫말은 사랑스럽다. 결혼하지 않는 세태, 열렬한 사랑에 빠지기 힘든 현실 속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나훈아의 특색 있는 감성은 여전하다. <테스형>은 이번 나훈아 추석 공연 중 단연코 화제를 불러왔다. 그만의 새로운 시각과 감성, 54년 동안 노래를 불러 온 가수의 철학이 풍부하게 담겨있는 노래다.

나훈아는 추석 공연 후 KBS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자신은 ‘유행가 가수’라고 말했다.

"흐를 유, 행할 행, 노래 가, 유행가 가수다“라고 말이다. 그가 공연 도중 했던 멘트에 대해 대중은 이런저런 해석을 하나, 그것이 나훈아의 원래 모습이다. 지나친 확대 해석은 불필요하다. 나훈아는 테스토스테론을 뿜는 남자다운 가수임에 틀림없다. <남자의 인생>을 들려주면서 이 시대 아버지들에게 힘내라고 응원했고, 젊은 록그룹과 <사내>를 함께 불렀다. 역시 나훈아다운 공연 방식이다.

‘변하면 변할수록 변하지 않는다’ 는 프랑스 격언이 있다. 대중음악 역시 돌고 돌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는 사실이다. 나훈아는 이러한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아티스트다. SW

murphy8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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