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평창올림픽에 ‘평화메신저’ 역할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부부장 강등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주도
2021년 들어 숙청·처형 등 ‘악녀역’ 자처
[시사주간=양승진 북한 전문기자] 2011년 12월 28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정을 앞세운 운구 행렬이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앞에 들어섰다. 후계자였던 김정은이 당시 북한 핵심 실세 7인과 함께 운구차를 호위했고, 단상 한 가운데 올라 육해공군을 사열했다. 이때 김정은과 간부들 옆으로 앳된 얼굴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 안에서도 내내 김정은의 곁을 지킨 이 여성은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김정일의 딸인 여정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슬픔에 잠긴 초췌한 막내딸의 모습으로 그렇게 대중 앞에 처음 공개됐다.
그리고 6년 후 김일성 105회 생일 열병식에 등장한 김여정은 그때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김정은 옆에서 환하게 웃으며 공식석상 전면에 나섰다. 김여정이 두 번째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2년 7월 25일 평양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장에서다. 김정은과 아내 리설주의 뒤로 화단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거나 박수를 치고 환하게 웃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2014년 3월 9일 김여정은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에 동행하며 ‘노동당 책임일꾼’으로 불려진다. 조선중앙TV는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인 김경옥 동지, 황병서 동지, 김여정 동지가 동행했다”고 멘트했다. 이로써 당의 핵심 직책을 맡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호칭뿐만 아니라 김여정은 처음으로 수첩과 펜을 들고 메모하는 모습이 포착돼 공식적으로 핵심 직책에 진입했음을 보여줬다. 2014년 11월 조선중앙TV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들인 김여정 동지, 김의순 동지가 동행했다”면서 김여정의 직책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공식 호명했다.
이후 김여정은 다양한 분야의 현지지도에 동행하며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필했다. 모란봉악단 공연 관람을 비롯해 송도원 국제소년단야영소 등의 준공식과 군부대 시찰까지 김정은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했다.
2016년 5월 6일 조선노동당 제7차 대회에서 김정은의 꽃다발을 받아들며 밀착 수행을 한 김여정은 마침내 당 중앙위원회 위원 자리까지 올랐다.
김여정의 존재를 각인시킨 때는 2018년이다.
2018년 2월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김여정은 ‘평화의 메신저’로 다음날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하며 남한 언론에 모습을 비췄다.
그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5월 26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 9월 18~19일에는 평양에서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2019년 2월 27~28일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등에 동행한 김여정은 ‘하노이 노딜’로 근신을 하는가 싶더니 그해 6월 19일 판문점에서 이희호 여사 서거에 따른 조의문과 조화를 들고 나타났고, 6월 30일에는 남북미 판문점 회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여정은 2020년 3월 본인 명의의 첫 담화에서 당시 청와대가 북한의 방사포 발사에 우려를 표명한 데 대해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며 막말의 포문을 열었다.
2020년 4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사망설에 휩싸였을 때 2인자로 거론되던 그는 4월 30일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장에 오빠와 함께 나타나 사망설을 불식시켰다.
또 같은 해 6월 4일에는 대북전단 살포를 맹비난한 담화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잘난 척, 정의로운 척, 평화의 사도처럼 처신머리가 역겹고 꼴불견”이라고 했다.
그해 6월 16일에는 대북전단 살포 등에 대한 남한당국의 대응을 문제 삼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그러다 군사행동계획까지 표명했으나 2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류를 결정했다.
2020년 4월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에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한 김여정은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으로 당-정-군의 인사권과 검열권을 관할하는 조직지도부를 장악하는 등 정권 2인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올해 1월 제8차 당대회에서 김여정은 당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당중앙위원으로 강등된데 이어 직함도 당 제1부부장에서 부부장으로 강등됐다.
2021년 들어 주로 대남 담화에 열을 올린 김여정은 3월 16일 한미훈련에 대해 “3년 전 봄날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난성명을 발표했고, 3월 30일에는 문대통령의 서해수호의 날 연설을 비난하며 ‘미국산 앵무새’라고 지칭했다. 5월 2일에는 대북전단 살포와 관련 “남쪽에서 벌어지는 쓰레기들의 준동을 우리 국가에 대한 심각한 도발로 간주하면서 그에 상응한 행동을 검토해볼 것”이라고 했다.
김여정은 ‘하노이 노딜’ 이후 대남전선에서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하더니 이제는 악녀 역을 자처하고 나섰다.
북한 내부에서도 고위 간부들의 숙청과 처형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악녀’로 지목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2019년 신의주세관 간부들의 총살 사건에 이어 지난해 신의주 시당과 행정, 보위부간부들에 대한 검열 사업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간부들을 처형했는데 이 사건을 김여정이 주도했다는 설이 파다하다.
지난해 12월에는 혜산에서 금괴밀수 사건이 벌어져 10명의 국경경비대 보위부 간부들과 하전사가 총살되고 9명의 주민은 무기징역, 수십 명의 가족들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사건 또한 김여정이 직접 비준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간부들과 주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최근에는 평양에서 큰 단위 간부가 총살됐다는 소식이 간부들 속에서 퍼지고 있는데 총살된 간부도 김여정이 찍어 넘겼다(죽였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양강도에서는 김여정의 지시로 국경지역에서 기밀자료와 강연자료 등을 (남한)국정원에 넘기는 반동을 잡는다며 중앙당 검열이 지속되면서 여기에 연루된 혐의로 많은 사람들이 관리소(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고 있는데 주민들 속에서는 김여정을 과거 중국 청나라의 ‘서태후’라고 부르며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올해 들어 김여정이 조금이라도 제 기분에 거슬리는 간부들은 점찍고 있다가 당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자료를 묶은 후 해당 간부들을 반당반혁명분자로 처형하는 사건이 이어지고 있어 그에 대한 간부들의 원한도 깊어지고 있다.
지난 14일 평양 사동구역에서는 삐라 대량 살포사건이 발생했는데 북한 내에서 만든 이 삐라에는 ‘김정은 시대는 끝났다’ ‘김정은을 위해 일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자’ ‘우리는 개방해야 잘 살 수 있다’ 외에 ‘김여정은 악종’이라는 구호도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여정에게 칭찬을 받아도 무섭고 찍히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처형을 각오해야 한다는 공포감으로 간부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면서 “김여정에 의해 억울하게 처형된 간부들과 그 가족들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주민들까지도 김여정이라면 사람 잡는 악마로 무서워한다”고 말했다. 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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