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간은 웃지도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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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간은 웃지도 말아라”
  • 양승진 논설위원
  • 승인 2021.12.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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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등 북한 실세 8인이 김정일 장례식 때 운구차를 호위하고 있다. 사진=시사주간 DB
김정은 등 북한 실세 8인이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장례식 때 운구차를 호위하고 있다. 사진=시사주간 DB

[시사주간=양승진 논설위원스트레스(Stress)라는 말은 라틴어 스트링어(Stringer)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팽팽하게 당기다’ ‘쪼이다라는 의미였지만 오늘날엔 다양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인 긴장상태 또는 그런 상태에 저항하는 반응이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스트레스가 학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분야는 물리학, 공학이었다. 미국의 생리학자 캐논(Canon)은 생명체의 생존을 위한 시스템을 연구하면서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생리학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생명체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생존수단으로 투쟁-도피 반응(fight-flight response)을 한다는 것을 밝혔고, 이때 일어나는 생리적 균형(homeostasis)을 규명했다.

이후 1936년 캐나다의 학자 한스 셀리(Hans Selye)가 스트레스에 대해 개인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지각되는 외적, 내적 자극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는 생명체가 외부의 환경이나 내부의 변화에 즉각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싸울지 도망갈지를 빨리 결정하게 하는 그야말로 객관적인 생존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할수록 응급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게 된다.

탈북민들의 사회정착 지원 기관인 하나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강사가 스트레스 해소 방법에 대해 얘기하는데 탈북민들이 스트레스라는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자 강사가 저 앞에서 보안원이 걸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했더니 탈북민들 모두 아~ 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강사는 그게 바로 스트레스라고 하자 단박에 알아들었다는 후문이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소위 알아서 행동해야 한다. 원인이 그렇다면 결과는 어떨 것이라는 걸 알기에 몸과 마음을 다스려 그것에 매달리게 한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북한의 공포정치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해 12월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만들었다. 남한 영상물 유입이나 유포는 최고 사형에 처하고, 시청은 기존 징역 5년에서 15년으로 강화했다. 영상물뿐 아니라 도서, 노래, 사진도 처벌대상이고, 남조선 말투나 창법을 쓰면 2년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는 조항도 신설했다.

공교롭게도 지난달 말 함경북도에서 오징어 게임사건이 터졌다. 한 고등학생이 밀수업자한테 구매한 오징어 게임을 수업시간에 몰래 친구와 본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이 친구가 다른 몇몇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결국 관심을 갖게 된 학생들 사이에서 오징어 게임파일이 담긴 USB가 돌고 돌았던 것.

이런 비밀이 오래 갈 리 없었다. 결국 제보를 받은 109상무 연합지휘부가 검열에 착수해 이들을 일망타진했다. 복제본을 고등학생에게 몰래 판매한 밀수업자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USB를 구매한 학생은 무기징역을, 함께 시청한 나머지 학생들은 5년의 노동교화형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교사와 학교 관리자도 해고된 뒤 오지의 광산으로 끌려가거나 시골로 유배될 위기에 처했다는 후문이다. 이 사건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제정 이후 처음으로 청소년이 적발된 사례다.

당국은 코로나19 여파로 국경이 폐쇄된 상황에서 오징어 게임파일이 어떻게 밀반입됐는지 파악할 때까지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조사할 예정이어서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오징어 게임복제본은 한 사건이지만 전 국민은 이것으로 인해 주눅 들게 된 것이다.

또 량강도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와 유사하다. 혜산시의 한 초급중학교에 재학하는 14세 학생이 남조선(한국) 영화 아저씨를 시청하다 체포됐는데 이 학생은 영화 시청 5분 만에 단속됐고, 14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반동사상문화배격법에는 청소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명시돼 있지 않지만 이를 그대로 적용한 것을 보면 어리다고 봐주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동안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적잖이 유행을 끌었다는 점을 인지한 당국이 엄격한 법 적용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취지가 엿보인다.

오는 17일은 김정일 사망일이다. 당국은 10일부터 20일까지 열흘간을 애도기간으로 정했다. 이 기간에는 긴장된 마음으로 애도분위기를 보장하라는 중앙의 지시가 하달돼 술도 먹지 말고, 웃지도 말고, 놀지도 말고, 열성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열흘간 웃지도 말아야 한다는 건 북한 주민들에게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스트레스 치료제가 웃음인데 웃지도 말라고 하니 삶 자체가 그냥 스트레스인 셈이다. SW

ysj@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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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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