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진상 일본의 생체실험⑤] 관동군 731 특수부대 진상조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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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진상 일본의 생체실험⑤] 관동군 731 특수부대 진상조사 개요
  • 황채원 기자
  • 승인 2019.09.1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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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사용한 세균폭탄. 일본 침략군은 1932~1945년 중국에서 군인 1만 명으로 구성된 세균전쟁 부대 60개를 만들었다. 중국 시민 최소 27만 명이 생체실험의 피해자다. 악명 높은 '731부대'를 포함한 일본군은 생체 세균실험에 기반을 둔 세균무기를 개발했다. 또 이 세균무기를 전투에서 사용해 중국 시민에게 페스트와 탄저병을 유발했다. 사진 / XINHUA


9. 핵심세력 및 전범재판 면제자

1. 동상실험의 요시무라히사토(吉村壽人) 교토 부립의과대학 학장

2. 병리의 오카모토게이조(岡本耕造)는 교토 대학 의학대학 학장

3. 병리의 이시카와다치오마루(石川太刀雄丸) 가네자와(金澤) 대학 의학부 부장

4. 고바야시 로쿠조 일본 국립 방역연구소 소장

5. 나카구로 히데토시 국방 의학대학 총장

6. 나이토 료이치 녹십자 회장

7. 기타노 마사지 녹십자 대표이사

8. 가수가 추이치 트리오-켄우드 회장

9. 요시무라 히사토 교토 의학대학 총장

10. 야마나카 모토키 오사카대 의과대학 총장

11. 다나카 히데오(오사카대 의과대학 학장

미국 플로리다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인권옹호단체 피억류자제권리센터는 현재 생존해 있는 관련 구일본군이 200명이라고 밝혔다. 이들 구일본군 명단은 미법무부 특별조사국에 보고돼 있다. 피억류자제권리센터 헤어국장은 “전후 벌어진 도쿄재판에서 구일본군전범으로 5000명이 재판을 받았으나 인체실험을 행한 731부대와 종군위안부관계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독일의 전범처리와 비교해 볼 때 구일본군전범에 대한 수사는 관대했다”고 증언했다. 이시이를 포함해 이 부대 관계자들은 전범죄자로 기소되지 않았다. 전후에 열린 도쿄전범재판에서 'A급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은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 등 7명에 불과했다.

10. 종전 후 처리

이시이는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에 진주하는 미군 등 연합군을 세균으로 공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이 같은 사실은 이시이가 종전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부터 26일까지의 상황을 대학노트에 정리한 '1945-8-16 종전당시 메모'에서 밝혀졌다. 731부대가 2차대전 종전 직전 특공대를 이용해 세균공격을 준비했던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종전 후에도 부대장이 공격 가능성을 검토한 사실이 확인된 것. 메모의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어서 공격계획이 실제로 어디까지 구체화됐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메모에는 731부대의 전후처리 방침과 처리경위가 기록돼 있다.

“되도록 많이 내지(일본)로 수송할 방침. 마루타-PX는 먼저”라는 기록도 보인다. PX는 페스트균에 오염된 벼룩을 가리킨다. 또 “사가미(相模)만에 25일 미군 상륙 전국에 살포”, “돌아가는 범선으로 인원. 기재 수송이 가능할 전망” 이라고 적어 세균무기를 이용한 공격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세균무기 관련 요원과 기자재 수송을 검토한 경위도 적혀있다. 그러나 미군 선발대가 일본에 도착하기 이틀 전인 8월 26일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 육군참모총장과 가와베 도라시로(河邊虎四郞) 참모차장이 “개죽음은 그만두자, 조용히 때를 기다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돼 있어 육군 수뇌부가 계획을 말린 것으로 돼 있다. 이 메모는 재미 일본인 저널리스트가 이시이부대 군속 출신에게서 입수해 공개했다.

또 731부대 연구가인 가나가와 대학의 스네이시 게이치(常石敬一) 교수는 마루타운송 관련 기록에 대해 “포로를 산채로 일본으로 보낼 생각을 했을 가능성 보다는 생체실험을 하면서 만든 병리표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시이는 전후 도쿄 국제 군사 법정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으며 마루타가 총 3850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러시아인이 562명, 한국인이 254명,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11. 이시이와 미국

전후 미군은 731부대의 인체실험 자료와 맞바꾸는 조건으로 이시이,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중장을 비롯한 731부대원의 전쟁범죄를 묵인했다. 미국은 냉전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731부대의 기밀자료를 거래했던 것이다. 미국 국무부 극동소위원회는 맥아더에게 ‘이시이 등 관계자를 전범으로 소추하지 않을 것이나 언질을 주지 말 것이며 종래 방법대로 모든 정보를 하나 남김없이 입수하는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독일은 전범들이 사형당하거나 형을 살았지만 1960년 이후 투옥되거나 사형이 실행된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다. 미국의 전범수사 기록은 공포되지 않았다. 이시이는 전후 생물학자로서의 명성을 날렸고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했다.

기타노 중장은 46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귀국한 직후 심문을 받았으나 1년 후 소련 측에 의해 인체실험 사실이 부각되기까지 다른 간부들과 함께 진상을 숨겨왔다. 그러나 관련자들은 사실이 발각된 이후에도 인체실험과 관련된 자료를 미국 측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면책돼 전범들을 심판한 도쿄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일본 가나가와 대학의 스나이시 게이치 교수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한 2건의 기밀 해제 문서는 이러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종전 2년 후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 주도 연합군이 731부대원들에게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 재판의 기소를 면제해줬으며 총 15만∼20만 엔의 돈을 부대원들에게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이시이는 탄저균, 페스트 등에 대한 각종 인체실험 자료 800여건과 약 8000점의 슬라이드, 35종 이상의 보고서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이 자료들은 미국 생물무기연구의 본부격인 매릴랜드주에 있는 디트릭 부대로 전해졌다. 디트릭 부대가 생물무기 관련 책임부대로 선정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였다. 1941년에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시작한 미국은 다음 해에 생물전 프로그램을 전담할 부서를 신설했으며, 미 육군의 화학전 연구부대에 생물무기 연구개발을 의뢰하면서 무기개발을 시작하였다.

참으로 이해할수 없는 것이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에서 우리 한국인은 전범자로 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재판절차 없이 일본 패전 후 B,C급 전범으로 몰려 사형이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진상조사팀장 이세일박사)에 따르면 "영국의 국가기록원에서 입수한조선인 포로감시원 15명에 대한 '군검찰관 기록'을 분석한 결과, 명확한 증거없이 유죄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인 B,C급 전범 148명중 23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는 것이다. 새삼 독일의 전법처리 결과를 들쳐 낼 필요도 없이 약소국의 설움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시사주간=황채원 기자] 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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