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험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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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험지'란 무엇인가?
  • 황채원 기자
  • 승인 2020.01.1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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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사진=뉴시스

[시사주간=황채원 기자] 총선 정국에서 흔히 쓰는 말 중의 하나가 '험지'다. 험지(險地)는 본래 '험난한 땅', '다니기에 위험하고 어려운 땅'이라는 뜻이지만 선거에서는 '당선이 어려운 지역'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민주당 지지가 높은 광주, 호남 지역에 한국당 후보가 출마하거나 한국당 지지가 높은 대구, 경북 지역에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는 예가 가장 대표적인 '험지 출마'의 모습이다.

험지 출마는 비록 낙선의 결과가 나온다해도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노력'을 인정받고 정치 인생에서 더 도약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또 당선이 힘든 곳의 출마는 '자신을 포기하며 당을 살리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고 이를 통해 오히려 그 지역에서 지지를 얻는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2000년 총선에서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깨겠다'고 선언하며 당선이 보장되던 서울 종로구를 떠나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지지가 높은 부산 북구강서구을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이를 계기로 '노사모'가 결성이 됐으며 이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여당의 대통령 후보, 그리고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가장 큰 힘이 됐다.

또 경기도에서 3선을 했지만 보수성이 강한 대구로 내려가 국회의원, 대구시장 낙선 끝에 20대 총선에서 당선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구에서 승리를 거둔 점 때문에 '잠룡'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경우 2008년 경기도를 떠나 한나라당의 지지가 굳건한 대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지만 3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면서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전례를 이야기해도 막상 '험지에 출마하라'고 한다면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험지 출마는 곧 낙선'이라는 '1차원적 사고'가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지역구에서 심판을 받겠다', '내가 출마하는 곳이 험지다'라는 논리를 펴기도 하며 심지어는 험지 출마를 '내치기'로 생각하기도 한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출마설이 돌았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총선을 앞두고 험지로 가겠다. 국민이 원한다면 험지보다 더한 험지도 가겠다.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국무총리 임명이 국회를 통과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정세균 총리의 지역구인 종로구 출마로 기우는 모습을 보이자 한국당은 '종로를 제외한 수도권 험지를 검토 중'이라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험지보다 더한 험지도 가겠다'면서 정작 이낙연 전 총리를 피하는 모습은 '정말 황 대표가 험지로 갈 것인가?'라는 의심만 키우고 있다.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인재영입위원장은 지난해 12월 "새보수당이 가장 어려운 지역은 대구 경북이다. 자유한국당 지지가 강하고 험지인 대구에서 결과를 얻어내야한다"며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미 4번이나 유 위원장을 당선시켰고 심지어 2016년 총선에서는 무소속 후보였음에도 75%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된 곳이기에 이곳을 '험지'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역시 남겼다.

그런가하면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PK(부산 울산 경남) 정서가 뭉쳐야한다"며 당이 요구한 수도권 출마를 거부하고 고향인 경남 밀양 창녕에 출마하겠다고 밝히며 '험지 출마'를 아예 거부했다. 그러나 이 결단(?)은 '수도권에서 100% 낙선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라는 비야냥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들은 나름대로 험지라고 주장을 할 것이다. 한국당 입장에서는 당선이 보장된 대구 경북이 아니라 한국당에 부정적 여론이 많은 서울, 수도권이 험지라고 생각할 수 있고 새보수당 입장에서는 한국당으로 결집되어가는 대구 경북이 자신들의 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PK 결집을 위한 결단',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은 '험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든다. 다시 사전적 의미로 돌아가보자. '험난한 땅', '다니기에 위험하고 어려운 땅'.  정말로 그들은 그곳이 위험한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곳을 '위험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들이 생각하는 '험지'의 의미가 참으로 궁금하다. SW

hcw@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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