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형묵 NCCK 정의평화위원장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 차별금지법은 당연한 신앙적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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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형묵 NCCK 정의평화위원장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 차별금지법은 당연한 신앙적 요구"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0.05.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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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구절만으로 '동성애 반대' 보수 기독교계, 타자 부정으로 정체성 드러낸 것"
"종교의 정치 참여, 신앙과 보편적 공감 갖추고 해야"
"'환상적 만족' 떠나 생활 속에서 튼튼히 자리잡는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

[시사주간=임동현 기자] 기독교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안타깝지만 아직 한국의 기독교는 일반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현장예배를 강행하는 교회에 대한 비판, 총선을 전후해 전광훈 목사로 대표되는, '막말'과 정치 참여에 대한 비판 등이 어우러지면서 한국의 기독교는 '개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기독교의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월 보수 기독교계가 '동성애 옹호'라며 반대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는 목소리가 기독교계에서 나왔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최형묵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에게 차별금지법과 '포스트 코로나' 속 예배와 교회의 미래를 물어보았다. 

최형묵 NCCK 정의평화위원장. 사진=임동현 기자
최형묵 NCCK 정의평화위원장. 사진=임동현 기자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권의 기준을 확립하고 실제로 이를 규율하는, 구속력을 가진 원칙이 확립되어야한다고 본다. 지금 혐오발언이나 차별 등이 굉장히 심각한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전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고 구속력 있는 법 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천부인권'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인간에 부여하고 예수님은 차별받고 배제된 사람과 함께 했고 심지어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 정신이 오늘날 차별금지법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우리 삶에 구현시킨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은 필요하다. 당연한 신앙적 요구다. 

목사들이 '예배 시간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말을 한다면 구속된다'는 말을 한다고 하는데 보완책을 두면 된다. 예배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하는 것은 신념의 표현일 수 있는데 그것은 인정해주자. 이를 처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대화를 유도하는 쪽으로 고려해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21대 국회에서 통과가 되어야한다. 지금 못하면 더 미루어진다. 사회적으로 차별금지법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알릴 것이고 제정을 계속 촉구할 것이다. 

보수 기독교계가 '동성애 반대' 등을 이유로 차별금지법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차별금지법 제정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는데

'동성애를 정당화한다', '성서가 죄라고 말할 것이다', '전도도 자유롭게 못한다'고 이들은 이야기한다. 성서가 동성애를 죄악시한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인데 이들의 논리를 보면 결국 특정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성경에서 동성애는 '성적 지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성적 착취'를 문제로 삼고 있다. 로마제국 시절 귀족들이 가난한 미소년들을 학대한 것을 비판한 것이고 권력을 가진 이가 남자든 여자든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레위기에서 금기로 다룬 부분 때문에 동성애를 금한다고 하는데 다른 금기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유독 동성애만 부각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분들은 문자적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믿는 부분만 골라서 믿고 있는 셈이다. 숲을 보지 않고 그 숲의 나뭇잎 하나만 보고 말하는 격이다.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는, 결국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그것이 신앙의 차원으로 인식되는 게 주류 한국교회에 자리잡고 있다. 반대가 기독교의 증표처럼 여겨지고 있다. 반동성애는 물론 반공, 반이슬람, 반이주민도 그 연장선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동성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한다고 보는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 하나님 아래에서 우리는 동등한 형제 자매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는 게 기본 정신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동성애가 질병, 비정상으로 여겨졌던 때가 있었지만 현대의학에서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고 하고 성이 단순하게 남녀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도 밝혀졌다. 다양한 인간의 존재가 나올 수 있고 마음의 지향은 더 다양할 수 있다. 그 다양성을 수용할 때가 왔다. 성적 지향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거나 불편함을 야기하지는 않고 있다. 다른 존재가 어울리며 살아가도록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기독교의 정치 참여'에 대한 생각은?

원칙적으로는 참여가 가능하고 정당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정교분리'를 말하지만 근대국가의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화, 종교의 정치화를 금지한 것이지 정치 자체를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 기독교가 정치에 참여하려면 신앙적 가치에 부합되어야하고 사회 보편적 가치에도 부합해야한다. 독단이 아니라 일반 시민 사회에서 보편적 공감을 얻는 내용과 방식이어야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독교 정당을 보면 공감이 가는 공약이 하나도 없다. 목소리 높은 사람이 득세하는 우리 현실에서 아직은 원칙을 갖춘 기독교 정당이 나오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무조건 '장로니까 대통령으로 만들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신앙에 비춰볼 때 좋은 정책을 가지고 있는 분이니 지지해주자'라고 한다면 가능하다. 원칙의 선을 지켜야한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기독교가 많은 비판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배 문제의 경우 교단이 다 독자성을 가지고 있고 말 그대로 '협의체'이기에 자율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권고는 할 수 있지만 강제는 못한다.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중앙에서 강제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밖에서는 한 몸체로 인식하기에 비판이 나온 것으로 안다.

솔직히 현재로는 묘안이 없다. 할 수 있는 방법은 건전한 기독교인의 목소리를 잘못된 기독교의 목소리와 상대화시키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없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건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차별에 반대하고 성경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의 활동이 묻혀버리고 전광훈 목사의 발언 등이 더 부각되니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묻혀있는 건강한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부각시키는 것 외에는 지금은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다. 

신천지 등 이단의 존재가 알려지고 있음에도 교회 내에서 이를 막는 노력이 부족해보인다. 어떻게 보시는지?

역시 이를 막을 강제수단이 없다. 유일한 수단이라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배척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된다. 이단은 별종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낳은 것이고 한국교회의 평균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단을 배태시킨 한국 교회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까 '반대함으로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말을 했는데 '예수천국 불신지옥' 등의 불안을 조장해 교회에 모이게 하고 성장하는 것이 지금의 교회다. 성찰의 신앙이 아니라 지옥이 두려워 환상적인 만족을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것을 교회가 충족해 주고 신앙의 길로 이끄는 계기를 만드는 것은 긍정적이다. 문제는 지금 거기에 교회가 머물러있다. 신앙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고 '환상적인 만족'만 주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 그 힘은 신천지가 더 세다. 결국 교회 스스로 신천지를, 이단을 낳은 것이다. 

'신앙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구현할 것인가' 그 문제의식을 가져야하고 사회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고치는 데 힘을 모드는 것이 신앙 공동체의 힘이라고 본다. 교회의 변화를 앞으로의 숙제로 삼아야할 것이다.

광화문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순절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최형묵 위원장. 사진=최형묵 제공
광화문 농성장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순절 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최형묵 위원장. 사진=최형묵 제공

 

'포스트 코로나' 이후 예배가, 교회가 어떻게 달라질 것이라 보는지?

특정한 시공간으로 한정됐던 예배가 바뀌었다는 것은 충격적인 변화다. 사실 기독교의 탄생을 보면 성전이나 집이 아닌 공동체에서 발달했다. 교회는 집의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의 개념이었다. 초기의 정신을 회복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온 세계가 하나로 연결이 됐고 그동안 교회와 멀어진 이들이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됐다. 문제는 교회의 핵심인 공동체성을 어떻게 구현하냐에 있다. 친밀한 교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사태로 체득한 방법을 포기하지 말고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기술 조건에 따라 화면으로 각자 집에서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다른 자리에서 합창을 하며 공동체를 느끼는 방법도 있다. 예배당이 아니더라도 예배의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장에서 예배를 드릴 분들은 현장에서 드리면 된다. 많은 교회가 현장과 온라인을 병행할 것이고 이를 확장하면서 교회가 사회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기회가 많아질 것으로 본다. 

주일학교가 없어진다고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하는데 저출산 탓만 할 수는 없다. 교회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매력을 주는 곳이 아니다. 제자 훈련 같은 프로그램이나 행사로는 아무 것도 발전시킬 수 없다. 교회 자체가 사회적 신뢰도를 얻는 길이 무엇이냐를 살펴보고 행동한다면 거기에 답이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다시 부흥하려면 어떤 노력이 선행되어야하는지? 

지금처럼 '환상적인 만족'으로 일관해도 부흥은 된다. 하지만 신천지도 그렇게 한다. 프로그램을 발전시켜도 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은 시대정신을 헤아릴 줄 알아야한다. 개인에게 위로를 줌과 동시에 사회가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하는데 기여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현재 상황에서 7,80년대 '대부흥'은 오지 않겠지만 생활 속에서 탄탄하게 뿌리내리는 교회는 충분히 가능하다. 

기독교가 현 시대에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있다면 

많은 분들이 신앙을 강박증으로 만들고 있다. '안 믿으면 지옥가', '주일성수 안하면 벌 받아' 이런 식이다. 하지만 신앙은 적극적으로 기쁜 삶을 향유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성경에 다 나와있다. 부정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에서 벗어나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나'를 묻고 성찰하는 것으로 변화해야한다. 그러다보면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벅차다. 미움을 느낄 시간이 없을 것이다(웃음).

대통령께서 코로나19에 맞서면서 '어떤 생명도 덧없이 내보낼 수 없다'는 철학을 밝혔는데 이것이 전 사회 영역으로 확대가 됐으면 한다. 젊은 노동자들이 계속 희생되는데 내 아들, 내 동생, 내 형으로 생각한다면 그 희생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말도 전하고 싶다. SW

ld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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