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호텔 거지'와 '가성비' 중 더 슬픈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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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호텔 거지'와 '가성비' 중 더 슬픈 말은…
  • 이보배 기자
  • 승인 2020.12.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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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공실 상태에 있던 도심 내 관광호텔을 리모델링한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안암생활'의 복층 내부 모습. 사진=뉴시스
장기간 공실 상태에 있던 도심 내 관광호텔을 리모델링한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안암생활'의 복층 내부 모습. 사진=뉴시스

[시사주간=이보배 기자]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기자는 취업과 함께 여행용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 

면접 바로 다음주부터 출근하라는 회사의 요구도 있었지만 서울에 연고가 없었던 기자가 일주일 남짓한 기간동안 마련할 수 있는 숙소는 고시원이 유일했다. 물론 돈도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에 원룸 월세 정도는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고시원 생활은 3년이나 이어졌다. 돌아보면 인생에서 값진 시간이었지만 "좋았다"라고는 못하겠다. 좋게 말해서 "살 만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최근 정부의 11·19 전세대책 가운데 하나인 호텔 리모델링 주택, 이른바 '호텔 전세' 중 일부가 공개됐다. 서울 성북구 안암동에 공급한 매입임대주택 '안암생활'이 그 주인공이다. 

공개 전부터 '호텔 전세'는 '호텔 거지를 양산했다'는 다소 자극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정부가 내놓은 전세대책에 과거 역세권 청년공공임대를 끼워 넣은 것이라는 지적은 차치하고 1인 가구를 수용하는 청년주택으로서의 면면만 살펴보자. 

일단 안암생활은 지하철에서 도보로 7분~10분 내외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입지가 좋은 편이다. 전용면적 13~17㎡ 규모의 방들은 바닥 난방이 되고 개별 욕실을 갖췄으며 침대와 에어컨 등이 '빌트인'으로 제공돼 있다. 

임대료는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7만~35만원으로 주변 시세의 45% 수준으로, 입주자는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할 수 있고 최장 6년까지 거주가 가능하다. 지하 1∼3층에는 공유주방, 공유라운지, 코워킹스페이스, 공용세탁실 등의 커뮤니티 공간이 갖춰져 있다.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안암생활 내 공유주방. 사진=뉴시스
청년 맞춤형 공유주택 안암생활 내 공유주방. 사진=뉴시스

'안암생활'과 관련 쏟아지는 언론보도를 보면 일부 청년들은 '안암생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눈치다. 보증금과 월세 대비 '안암생활' 정도면 서울에서 구하기 힘든 자취방이고, 가격을 고려했을 때 개별 취사시설이나 세탁시설이 없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청년들에게 미안해졌다. 기자도 모르게 13년 전 기자가 지냈던 고시원과 '안암생활'을 비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일각에서 '호텔 전세'를 '럭셔리 고시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일부 수긍이 됐다. 

결국은 '가성비'였다. 13년 전 청년이었던 기자가 고시원이 "살 만했다"고 추억하는 것도, 2020년을 살고 있는 청년들이 '호텔 전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전히, 그리고 순전히 '가성비' 때문이다. 

정부는 '호텔 전세'가 '1인 가구에 굉장히 좋은 환경'이라고 밝혔지만 '가성비 좋은 주거 형태'일 뿐이다. 

'이만 하면 괜찮지' '잠만 자는데 뭐'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청년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청년은 최소한의 생활만 해도 충분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빠르게 주택 공급량을 늘리려는 정부의 시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호텔 전세'는 청년 주거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청년들이 '가성비'보다 삶의 질을 우선 순위로 안정적인 주거지를 확보할 수 있게 도울 수 있어야 한다. '호텔 거지'라는 말보다 '가성비' 위주로 청년 정책에 접근하는 정부의 시각이 더 슬프다. SW

 

lbb@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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