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완행 버스 소매치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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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완행 버스 소매치기의 추억
  • 주장환 논설위원
  • 승인 2021.07.28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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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북면온천
사진=북면온천

[시사주간=주장환 논설위원] 50여년 전 어느 여름날 한 밤, 아재(삼촌)가 시골 고향집(경북 영천)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고 얼굴은 창백하고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재가 올 시간이 지나 밤이 늦어서도 오지 않자 식구들은 고향집에서 "하룻밤 더 자고 내일 오려나 보다" 하고 잠들다 깬 참이었다.

모두들 두려움에 떨며 방안에 들어선 아재의 입을 바라다 보았다. 아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돌아오던 버스에서 돈을 몽땅 도둑 맞았다고 했다. 그래서 영천 장터를 미친 듯 돌아다니고 파출소에도 사정해 봤으나 바보 취급만 받았다며 머리를 싸맸다.

당시에는 지금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큰 돈이 생기면 두루마기 옷소매안에 넣거나 보자기에 싸거나 그도 아니면 시멘트나 비료 포대 혹은 쌀 가마니에 넣어 다녔다. 당시 그런 돈을 넣을 가방이 변변치 않았는데다 일부러 돈 주고 돈을 넣을 가방을 살 만큼 여유가 없었기때문이었다.(그럴싸한 가방을 들고 다니면 소매치기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아재는 등록금 마련을 위해 우시장에서 소 판돈을 찹쌀, 좁쌀, 콩, 도라지 등 잡동사니들과 함께 비료 포대에 담고 완행 버스에 탔는데 워낙 발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라 선반 위에 비료포대를 올려 놓고 있었다. 설마 저 큰 비료포대를 누가 가져갈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천장에 도착하고 사람들이 분주히 오르내리는 사이 비료포대가 없어지고 말았다. 바람잡이가 아재의 앞에서 말을 걸고 시야를 가로 막는 사이 다른 일당이 들고 사라진 것이다.

아재는 그 일로 고등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야 했다. 50년이나 넘은 우리시대의 슬픈 에피소드이지만 아재의 그 날밤 그 처참했던 몰골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소매치기 범죄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과거 우리 주변에서 흔했던 소매치기 범죄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소매치기 범죄 발생 건수는 2011년에는 2378건이었지만 2019년에는 535건으로 줄었다. 매일 6.5건 일어나던 범죄가 하루 1건 수준(1.46건)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현금 사용이 줄어드는데다 비대면 결제가 일상화되고 CCTV 같은 방범 카메라가 버스 등 곳곳에 설치되면서 소매치기들이 활동할 공간이 사라졌기때문이라 한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신 아재가 지금 다시 영천장에 가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하다. SW

jj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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