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아웃사이더' 홍세화가 남긴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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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아웃사이더' 홍세화가 남긴 흔적들
  • 황채원 기자
  • 승인 2024.04.2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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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사진=장발장 은행
홍세화. 사진=장발장 은행

[시사주간=황채원 기자] 지난 18일 '진보의 큰 별'이 떨어졌다.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으며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장발장은행 은행장을 맡았던 '영원한 아웃사이더' 홍세화씨가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한 것이다. 대결과 증오로 얼룩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그가 생전에 주장했던 '똘레랑스(관용)'은 그의 죽음과 함께 새롭게 부각됐고 정치적으로 진보가 이전의 힘을 잃은 상황에서 진보의 어른을 떠나보내야하는 이들은 아쉬움과 그리움의 글을 자신들의 공간에 남기고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며 엘리트의 길을 가던 그는 1979년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 중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며 오랜 기간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했다.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그는 택시 운전, 관광 가이드 등을 하며 파리 생활을 해야했고 그의 경험은 1995년 펴낸 베스트셀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통해 전해졌다. 그리고 1999년 그는 2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2001년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편집위원을 맡았고 2011년에는 한겨레가 발행하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을 맡았다. 또 2013년에는 계간지 '말과 활'을 창간하고 발행인을 맡았다. 1999년 귀국 후 펴낸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아웃사이더를 위하여>(2000), <미안함에 대하여>(2020) 등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좌우 대립으로 얼룩진 한국사회를 향해 똘레랑스를 강조했으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2012년 그는 진보신당 당대표를 역임하는데 당시 진보신당에서 함께 했던 故 노회찬 전 의원, 심상정 의원이 당을 탈당하고 '진보정의당'을 만든 것을 비판하면서 난파선과 다름없던 진보신당을 살리기 위해 애썼고, 2019년 '조국 사태'때는 진보의 모순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여러 비판과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15년부터 비영리단체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을 맡았다. 장발장은행은 벌금 미납으로 교도소에 갈 위기에 놓인 이들에게 무이자로 일정 기간 돈을 빌려주는 곳으로 후원금을 통해 운영되고 있다.

지난 20일 열린 추모제에서 송경동 시인은 추모시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빨리 오지 않더라도 절망하거나 훼절하지 않고 겸손하겠습니다. 왜냐면, 이 나쁜 세상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견디며 살아가야하는 모든 소박한 이들의 삶이 우리에겐 더 소중하니까요. 당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부패하고 썩어가는 인간들 앞에서도 겸손하겠습니다. 왜냐면, 그들의 이른 주검이 새로운 시대의 싹들이 자라날 좋은 토양과 거름이 될 거니까요".

'겸손 앞에서도 겸손하겠다' 송경동 시인은 홍세화 선생의 영전에 이런 다짐을 했다. 겸손과 관용. 그것은 홍세화씨가 마지막에 우리에게 전한 작은 가르침이자 선물이었다. '이 땅에 본받을 어른이 없다'는 젊은 세대들의 탄식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래도 희망과 가르침을 주려는, 이를 스스로 실천하는 이들이 존재했고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오늘, 홍세화를 '이슈피플'로 정한 이유다. SW

hcw@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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