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 가습기 살균제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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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가습기 살균제 법정
  • 김기현 기자
  • 승인 2016.10.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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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에 유해한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신현우 옥시 전 대표. 사진 / 뉴시스 

[시사주간=김기현기자]  "우리 성준이 얼굴 좀 보세요. 당신들 때문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모를 이 아이의 얼굴을 좀 보세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임성준 군의 어머니 A씨는 신현우(68)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 등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 피고인들을 향해 절규하듯 외쳤다. 

1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311호 법정 방청석에는 유난히 작은 체구의 소년이 한명 앉아 있었다. 세련된 야구 모자를 쓴 영락없는 10대 소년이었지만, 아이의 코에는 산소 튜브가 꽂혀 있었다.

임군의 어머니 A씨는 이날 형사합의28부(부장판사 최창영) 심리로 열린 신 전 대표 등의 업무상과실치사·상 등 혐의 17차 공판에서 피해자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바보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살려만 달라고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아이가 깨어나면 엄마도 못 알아볼 수 있다고 했는데…수개월 만에 눈을 뜬 성준이가 저를 보고 웃더라구요. 산소호흡기를 물고 있으면서도…."

A씨는 "성준이가 살아있지만 잘 때 잠을 잘 못 잔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쉬는 게 힘들다고 한다"며 "나쁜 생각까지 했었지만, 제 옆에 기대서 숨 쉬고 있는 성준이를 보니 너무 미안했다"고 울먹였다.

이어 "성준이의 숨소리가 고를 때가 제일 행복하다. 가끔 이유 없이 숨 쉬는 걸 힘들어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고통을 호소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또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자신들이 잘못해서 많은 아이들이 아프거나 (세상을) 떠난 걸 안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게 맞다"며 "다들 결혼하셨으면 집에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 아이들은 건강히 잘 지내고 다른 아이와 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A씨는 "성준이가 최근 폐 기능이 많이 떨어지고 호흡 곤란 증세가 심해져 구급차를 불렀지만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더라"면서 "성준이 장난감을 정리하면서도 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는 다시 "우리 아들 이렇게 만든 제가 죄인인 것 안다. 평생을 지켜만 보면서 벌 받으면서 사는 것도 안다"며 "이 벌이 부족하다면 더 받겠다. 그러나 이게 제 잘못만은 아니지 않나"라며 흐느꼈다. 

A씨는 증인신문을 마친 뒤 아들인 임 군을 증인석으로 데려 왔다. 임 군은 "이름이 뭐니"라고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힘겹게 말한 뒤 다시 방청석으로 돌아갔다. 

A씨는 피고인들에게 "이 아이의 얼굴을 보라"고 했지만, 피고인들은 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딸을 잃은 B씨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대부분 직장을 잃거나 또는 가정을 잃었다"며 "단순히 피해자가 발생하는 차원을 넘어서 가족들이 모조리 해체되고 파괴되는 현실이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B씨는 또 "'아이에게도 안심'이란 문구 등을 결정한 저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수없이 죽어갔다"면서 "가습기 살균제가 폐 손상의 원인으로 밝혀진 이 시점까지도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용납되거나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B씨는 신 전 대표 등을 변호하는 변호인단을 향해서도 "저 사람들을 변호하기 위해 10명 이상의 변호사들이 '책임이 없다', '죄가 없다'고 변론하고 있다"며 "황사나 알레르기, 꽃가루 등이 원인이라며 자신들의 잘못은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사임하라. 위약금이 문제가 되면 피해자들이 십시일반 모아 보전해드리겠다"고 힐난했다. 

A씨와 B씨를 비롯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재판부에 피고인들을 엄벌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들은 "수백명이 다치고 숨진 이 사건에서 아직 가해자는 없는 상황"이라며 "저희같은 억울한 피해자나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게끔 사회의 경종을 울릴 수 있는 판결을 부탁드린다"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재판부는 이날 증인으로 출석키로 했으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호서대 유모(61) 교수를 오는 18일에 다시 증인으로 소환토록 구인장을 발부했다. 유 교수는 옥시에 유리하게끔 가습기 살균제 실험을 하고 뒷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신 전 대표 등은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하면서 흡입독성 실험 등 안전성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인명피해를 낸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SW

kk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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