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사실 공표' 사문화 된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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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사실 공표' 사문화 된 법인가
  • 이민정 기자
  • 승인 2023.12.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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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 '마약 혐의' 내사부터 언론 보도
이씨 "억울하다"…이튿날 숨진 채 발견
2008~2018년 피의사실공표죄 기소 0건
사실상 사문화된 법…"금지명령 도입해야"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배우 이선균이 숨진채 발견됐다. 지난 27일 경찰이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 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배우 이선균이 숨진채 발견됐다. 지난 27일 경찰이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 사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시사주간=이민정 기자]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배우 이선균(48)씨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피의사실 공표'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입건 전 조사(내사) 단계부터 중계된 경찰 수사와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무분별하게 옮긴 언론·유튜브 등이 이씨를 죽음으로 내몬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면서다.

2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이씨의 마약 투약 혐의가 처음 언론보도로 알려진 건 지난 10월19일이었다. '톱스타 L씨'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의 입건 전 조사(내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실명이 나오진 않았지만 'L씨'라는 표현과 데뷔 연도가 해당 기사에 적혀 사건 당시부터 이씨가 마약 사건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다. 내사 단계로 범죄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단계였다.

이튿날 그의 소속사는 공식 입장을 통해 "이선균은 (마약) 사건과 관련된 인물로부터 지속적인 공갈과 협박을 받아왔다"고 밝혔다. 톱스타 L씨가 이선균씨로 확인된 것이다.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 마약범죄수사계는 최초 보도 나흘 뒤인 지난 10월23일 이씨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상 대마·향정 위반 혐의로 정식 입건했다. 서울 강남의 유흥업소 실장 A씨의 자택에서 대마초·케타민 등의 마약을 투약한 혐의다.

이씨는 지난 10월부터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하며 경찰 조사에서 "마약인 줄 몰랐다. 유흥업소 실장에게 협박당해 3억5000만원을 뜯겼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3일엔 경찰에 3차 출석해 19시간에 걸친 강도 높은 밤샘 조사를 받았고, 26일엔 변호인을 통해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의뢰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인천경찰청 마약범죄수사계에 제출했다.

마약 투약 혐의 관련 증거가 유흥업소 실장의 진술뿐이라 억울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날까지 결백을 주장했던 이씨는 이튿날 오전 10시30분께 서울 종로구 와룡공원 인근 성북구 성북동의 한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형법 제126조는 "검찰과 경찰, 그 밖에 범죄 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수사기관은 공소제기 전 피의사실을 공표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혐의를 다투는 상황에서 무죄 추정 원칙을 벗어나지 않고 '여론 재판'으로부터 피의자를 보호하려는 취지로 지난 1953년 제정됐다.

그러나 관련 법 규정으로 처벌받은 사례가 없어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 법무부의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2019년 5월 발표한 피의사실 공표 사건 조사 및 심의 결과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8년 검찰에 피의사실공표죄로 접수된 사건 347건 중 기소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법이 사실상 사문화되면서 수사기관의 '망신주기' '기사 흘리기' 등이 관행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더불어민주당은 '대장동 특혜 개발 의혹'이 본격화한 이후 언론 보도가 잇따르자, 검찰의 불법적인 피의사실 흘리기가 있다고 의심하고 이를 수사하던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한 바 있다.

2019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 수사 당시에도 검찰 수사 내용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피의사실 공표죄 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일기도 했다.

법무부는 이에 기존 수사공보준칙을 폐지하고 2019년 10월 공표 금지의 강도를 더욱 높인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그러나 특정 언론사에 피의사실을 흘려 보도되는 뉴스는 여전히 적지 않은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법원의 피의사실 공개 금지명령 도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보도와 방송, 언급 등의 금지를 명령할 수 있는 현행 가처분 신청 제도처럼 피의사실공표와 관련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한상훈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의사실공표죄와 알 권리가 충돌하는 데다, 수사기관 역시 절차에 따라 내부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에 (피의사실공표 위반이) 기소까지 이뤄지는 것은 쉽지 않다"며 "신청이 있으면 법원이 명예 훼손이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고려해 공포 금지 명령을 내리고 이것을 어기면 처벌이 이뤄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 영국, 캐나다 등 해외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운용하면서 이를 어길시 '법정 모독죄' 형태로 처벌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윤희근 경찰청장은 이날 충북 청원경찰서에서 열린 특진 임용수여식 전 기자들과 만나 이씨 사망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일이 벌어져 놀랐다"면서도 "수사가 잘못돼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김희중 인천경찰청장도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건과 관련한 조사, 압수, 포렌식 등 모든 수사 과정에 변호인이 참여했고 진술을 영상녹화하는 등 적법절차를 준수하며 수사를 진행했다"며 "일부에서 제기한 경찰의 공개 출석 요구나 수사 상황 유출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SW

lmj@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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