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홍명희문학제 고향서 또 '퇴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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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홍명희문학제 고향서 또 '퇴출 위기'.
  • 시사주간
  • 승인 2013.10.3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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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일곱 번째 충북 괴산에서 열리는 홍명희문학제가 고향에서 또 '퇴출 위기'에 놓였다.

(사)충북민예총과 충북작가회의, ㈜사계절출판사는 다음 달 2일 괴산군 괴산읍 괴산군민회관에서 18회 홍명희문학제를 개최한다.

홍명희문학제는 1996년 11월 청주예술의 전당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후 해마다 청주, 서울, 괴산을 오가며 열렸다.

그동안 행사 장소는 청주예술의 전당에서 여섯 번 치러진 것을 비롯해 청주 우암교회, 충북대, 서울YMCA, 청주대, 국립청주박물관 등지다.

벽초 홍명희의 고향인 괴산에서는 1998년 10월 3회 때 '벽초 홍명희 문학비' 제막식과 함께 처음으로 열렸고 이후 외지를 떠돌다 2003년(8회)부터 2006년(11회)까지 4년 연속 괴산에서 개최했다가 다시 청주로 옮겼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괴산에서 열리면서 지금까지 18회 중 7회가 고향에서 진행했다.

외지에서 본행사가 열려도 생가와 고가 등 답사는 빼놓지 않았다.

홍명희문학제가 '떠돌이 신세'가 된 것은 벽초의 과거 행적과 깊은 관련이 있다.

벽초는 친일 행적을 한 조부(홍승목)와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해 자결 순국한 부친(홍범식)의 상반된 생애 사이에서 굴곡진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조선 3재(才)'로 불린 벽초는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을 저술한 문인이자 언론인이며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결성과 괴산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벽초는 이런 공적에도 해방 이후 북한 부수상을 지내면서 남한에서는 6·25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인식하면서 괴산읍 만세운동기념비에는 한때 그의 이름 석 자가 빠지기도 했다.

1998년에는 문학비 문구 논란으로 동판을 철거했다가 2000년에 일부 문구를 수정해 다시 부착했는가 하면 2008년에는 '벽초 문학상' 제정과 관련한 예산 2500만원을 보훈단체의 반대로 괴산군의회에서 전액 삭감했다.

2009년에는 홍명희문학제에 괴산문화원 등 괴산지역 참여를 전제로 한 예산 1000만원이 보훈단체와 행사 주최 측의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역시 군의회에서 전액 삭감했다.

홍명희문학제는 벽초의 굴곡진 삶 만큼이나 고향에서 둥지를 틀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괴산군 내 7개 보훈단체는 지난 30일 성명을 내고 홍명희문학제 개최를 반대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서에서 "홍명희는 뛰어난 소설가로 인정은 하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6·25전쟁 당시 김일성에 이은 부주석으로 전쟁의 주범"이라며 문학제 반대 이유를 들었다.

미술·문학평론가인 채수명 21세기경영연구소장은 지난달 5일 중원대에서 열린 '괴향문화' 21집 발간 학술 발표회에서 홍명희문학제의 시기상조를 주장했다.

채 소장은 '벽초 홍명희에 관한 종합·입체적 분석 평가와 교훈'에서 "홍명희 학술제는 가능하나 아직 문학제는 무리다. 남북이 대치하는 한 교육 차원에서 심각한 정체성 문제로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외교·군사학, 역사학, 철학, 사회심리학, 문학 등을 내용으로 한 백초 임거정 학술대회 필요성은 인정했다.

채 소장은 "홍명희의 민족적 중도론을 시대 정신에 맞게 한민족의 숙원사업인 남북통일을 위한 작은 밀알로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할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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