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손해배상 “피해자 고통 기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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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손해배상 “피해자 고통 기간 생각하라”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9.11.1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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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열린 '성폭력 피해자 민사소송 제기' 토론회  사진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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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임동현 기자] 법원이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동안 '소멸시효'로 인해 어린 시절 성폭행으로 피해를 입어도 구제될 방법이 없었던 피해자들이 이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지난 7일 의정부지법 민사1부는 '체육계 미투 1'로 알려진 전 테니스 선수 김은희 코치가 초등학생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테니스 코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범행으로 인해 원고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게 됐고, 이 불법행위로 인해 원고가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이 명백하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있다"며 원고에게 위자료 1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초등학생 시절 테니스 코치로부터 1년여간 성폭행을 당한 김 코치는 2016년 자신을 폭행한 코치를 우연히 마주친 후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겪게 됐고 결국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게 되자 20186월 테니스 코치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테니스 코치는 이미 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2018년 말 대법원에서 징역 10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손해배상 소송은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쟁점이 됐다. 그동안 성폭행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받아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소멸시효' 시작 지점의 문제였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21조에 따르면 미성년자 성폭력범죄의 공소시효는 미성년자가 성년에 달한 날부터 진행되고, 13세 미만이나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민사소송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민법 제766조에 따르면 손해배상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경과하면 소멸된다.

문제는 성폭력범죄의 경우 대부분 '불법행위를 한 날'을 범죄행위가 일어난 날로 계산을 해 가해자의 범죄 이후 피해자가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고 있고 현재도 손해가 계속 발생한다고 해도 손해배상 청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테니스 코치 측은 성폭행이 일어난 지 10년이 넘었기 때문에 손해배상 시효가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일명 '도가니 사건'으로 잘 알려진 광주인화학교 사건이다. 지난 2012년 성폭력범죄 피해를 입은 후 PTSD와 우울장애 진단을 받은 인화학교 성폭력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냈지만 법원은 "범죄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청구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며 청구를 기각했고 이는 "피해자들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은 판결"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번 2심 재판에서 재판부는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의 손해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원고가 최초 외상 후 스트레스 진단을 받은 20166월에 잠재된 손해가 현실화됐다고 보아야하고, 이는 원고의 손해배상채권의 장기소멸시효의 기산일이 된다"고 판단했다. 즉 손해배상청구 시효의 시작인 '불법행위를 한 날'을 성폭행을 당한 날로 잡은 것이 아니라 폭행으로 인해 PTSD 진단을 받은 날이며 '잠재적인 손해가 발생한 날'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한다는 것이다.

판결이 나온 후 한국여성의전화는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은 범죄행위가 있은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손해에 대한 배상을 인정하고 있다. 최근 성폭력 형사소송에서 PTSD를 상해로 인정한 판례가 종종 나오고 있어 어를 이용한 성폭력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이 더욱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현실화시키는 데 기여한 이번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밝혔다.

하지만 성폭행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하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은 게 현실이다. 상해로 인한 피해가 지속되거나 장기간이 지난 후 피해가 드러나는 경우 등에는 여전히 소송이 어렵고 법원이나 판사의 시선에 따라 '불법적인 행위를 한 날'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에 승소 확률 역시 아직은 낮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형사판결 확정 전 민사소송 제기시 작동되는 '꽃뱀 프레임', 피해자 신상정보가 가해자에게 공개되는 문제, 낮은 손해배상액과 보복 우려, 소송의 장기화 등으로 인한 고통 등으로 소송의 실익이 적다는 점이 걸림돌이다. 아직도 피해자의 용기가 필요한 이유다.

특히 어린 시절에 당한 성폭행의 경우 성폭행의 기억이 떠오를 시점에 이미 시효가 지나 청구권을 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동 성폭력, 성폭행 관련인 경우에는 20~30년까지 연장하거나 아예 소멸시효를 없애야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소멸시효 기산점에 대한 새로운 판단이 나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소멸시효 규정은 연령, 장애 등 피해발생 당시의 피해자 특성,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영향력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서 제도적인 정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한다고 밝혔다. SW

ld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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