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5주년 기획-선열들을 돌아보다②]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사이, 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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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기획-선열들을 돌아보다②]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사이, 그들이 있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20.08.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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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효창공원에 위치한 이봉창 의사 동상. 사진=임동현 기자
서울 효창공원에 위치한 이봉창 의사 동상. 사진=임동현 기자

[시사주간=임동현 기자]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1931년 12월 13일, 한 청년이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를 했다. 선서인의 이름은 이봉창. 그는 혈서로 쓴 선언문을 가슴에 붙이고 두 손에 수류탄을 든 채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김구 선생에게 이렇게 권한다. "나는 영원 쾌락을 향(享)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띄고 사진을 찍읍시다". 

그리고 한 달 뒤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불행히도 명중이 되지 않아 거사에 실패한다. 이 의사는 현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일본 관헌에게 체포된 후 그 해 10월 일본 땅에서 순국했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선서 후 찍은 사진.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선서 후 찍은 사진.

"이봉창 의사는 한인애국단 최초로 거사를 일으킨 분이십니다. 사실 실패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약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폭탄이 명중이 되지 않았고 폭탄 위력도 약했어요. 하지만 이 거사는 당시 침체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에 힘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많은 의사들이 나타난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봉창 의사의 동경 일왕 폭살의거야말로 항일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인 의거입니다. 하지만 이후 건국훈장이 추서됐을 때 이봉창 의사는 대통령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아야할 분인데 대통령장을 수여했다는 점은 뭔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해상 선생이 전한 이봉창 의사 의거의 의의다.

1922년 22세의 나이에 독립의 뜻을 품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그 곳에서 7년여간 일본인 행세를 하며 적정을 두루 탐색했던 이봉창. 그는 신분을 감추고 일을 하며 일왕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고 오랜 계획 끝에 거사를 실천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에 불렀던 만세는 이 결과가 결코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3개월 뒤 중국 상하이에서 터진, 일본군들에게 공포를 안겨 준 폭탄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이 이봉창 의사의 이야기는 그의 후손의 목소리를 통해 다음 편에서 다시 전하려한다. 

이동녕·조성환·차리석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름들

(왼쪽부터)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
(왼쪽부터)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

서울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 삼의사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와 더불어 임시정부의 요직을 거친 독립운동가 3인도 함께 잠들어 있다. 먼저 석오 이동녕(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과 주석을 맡으며 임정을 이끌었고 백범 김구 선생과 전시내각을 구성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싸웠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독립전쟁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우당 이회영 등과 함께 설립했다는 것이다. 청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던 신흥무관학교는 훗날 광복군의 요체가 되었고 최근에는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광복군의 정신을 관객들에게 전한 바 있다.

또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도 그의 도움이 있었다. 당시 임정의 국무위원제의 주석으로 있던 이동녕 선생은 국무원 재무장이었던 김구 선생과 막후에서 치밀하게 거사를 상의했고 이를 통해 두 의사의 의거가 가능해질 수 있었다. 

서울 효창공원에 위치한 임정요인 3인의 묘역. 조성환, 이동녕 차리석(왼쪽부터) 선생이 잠들어 있다. 사진=임동현 기자
서울 효창공원에 위치한 임정요인 3인의 묘역. 조성환, 이동녕 차리석(왼쪽부터) 선생이 잠들어 있다. 사진=임동현 기자

1920년 이동녕 선생은 "독립을 되찾는 데 하나는 내 동지들의 단결이요,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민족이 대동단결함에 있다"고 말했다. 이 말처럼 임정과 나라의 단결을 위해 애쓴 그는 1940년 숨지기 직전까지도 '민족진영 대동단결과 정당통합'을 역설했다. 임정의 중심에는 석오 이동녕 선생이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했던 청사 조성환(1875~1948) 선생은 생애의 대부분을 독립군의 조직과 통합에 힘쓰며 임시정부가 군사업무와 전시체제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군과 함께 광복군의 결성에도 기여했으며 이를 통해 임시정부가 자체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됐다.

국무위원 겸 비서장을 지냈던 동암 차리석 선생(1881~1945)은 1930년대 임정의 최대 위기 상황에서 임정을 꿋꿋이 지킨 사람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보좌하면서 40여년간 임정의 역사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임정이 분열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가 임정을 지켜왔기에 임시정부는 분열되지 않고 역사를 이어갔고 광복의 날까지 그 역할을 다해왔다. 광복 후에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그였지만 광복 직후 과로로 쓰러져 안타깝게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국했다.

이들의 노력을 아는 이들은 많지가 않다. 역사책에서 이들의 이름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흔들림없이 운영되고 이 정신을 대한민국이 물려받기까지는 이들의 숨은 노력이 컸고 이름을 비록 크게 알리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흔들림없이 하던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나라임을 다시 깨닫게 만든다. SW

ldh@economic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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